만암공(萬庵公)

휘 광조(諱 光肇, 관북32世 1747 ~ 1820 지장록 P146)는 참의공(參議公) 휘 창조(諱 昌祖)의 차자(次子)로 영조정묘(丁卯: 1747)에 태어나고 일찍이 박학굉사(博學宏詞)로서 그 문명(文名)이 1세를 풍미하였다. 영조 51년(甲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정조을묘(乙卯; 1795)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유곡(幽谷), 금교(今郊) 등 현감(縣監)을 거쳐 강원감사(江原監司) 당시(當時) 동지사 배표(冬至使拜表)로 천거되어 입시하였다.

그때 시월 조정사천관(朝廷使千官) 배표시(拜表時) “국약군신치(國弱君臣恥) 천한우설수(天寒雨雪垂) 산하미소왕(山河迷所往) 정절욕하지(旌節欲何之) 영능송백수(寧陵松柏樹) 향북불생지(向北不生枝)”라고 읊으니 왕이 크게 칭찬하기를“조선문장(朝鮮文章)이 많지만 위광조(魏光肇) 한 사람만 못하다” 하였다.

공은 초휘를 광조(光肇)라 하였는데 왕이 조자(肇字)와 석여(錫汝)라는 자(字)를 하사(下賜)하였다. 만년에 관직을 물러나 사호(沙湖)에 살면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만암집(萬菴集)이 있고 보의설(譜疑設)등으로 유명하니 세칭(世稱) 남유계항(南有桂巷)이요 북유만암(北有萬菴)이라 하였다. 순조 (純祖 庚辰: 1820)에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