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백규(伯珪, 26世, 1727∼1798 지장록 p287) 장악원정(掌樂院正) 휘 정열(諱 廷烈)의 현손(玄孫)이며, 춘곡(春谷,
또는 詠而齋公) 휘 문덕(諱 文德)의 장자(長子)로 총명(聰明)함이 절인(絶人)하였다. 처음에는 경학(經學)에 주력하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마음에 들지 않자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역(律曆), 복서(卜筮), 병도(兵韜),
산수(算數)를 비롯해서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습득하여 이에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다.
영조중엽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한 후 동양삼국(東洋三國)의 지도(地圖)와 지지(地誌) 역사(歷史) 및
제도(制度) 산업문물(産業文物) 그리고 서양제도(西洋 諸道) 지지(地誌) 기술(記述)한 환영지(환瀛誌) 와 고금서(古琴書)를
저술하고 조선 8도의 산천, 산물, 인구, 농지 등과 정폐(政弊), 민속(民俗) 및 원근(遠近)의 험이(險易)을 다룬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저술하였다.
영조 말 다시 생원 복시(覆試)에 합격하신 후 사성록(思成錄) 전후편(前後篇)과 자회가(自悔歌), 농가구장(農家九章),
고금예설(古今禮說), 경서조대독사차록(經書條對讀史箚錄),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및 잡저(雜著) 등을 차례로 저술하여
저서가 무려 90여권을 넘었다.
정조 말 공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의 천거(薦擧)로 사용(司勇)에 제수(除授)된
후 다시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거듭됨에 입궐하시어 만원상소(萬言上疏)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아니한 채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받아 500여일간 재임하였다.
그 후 노병(老病)으로 재삼(再三) 사퇴(辭退)할 것을 청했지만 그때마다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을
내리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못하고 72세로 졸하니 관산(冠山) 죽천사(竹川祠), 다산사(茶山祠),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書院),
합천(陜川)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9세 때 읊은 시 해설
發跡天冠寺(발적천관사) - 천관산 절을 떠나
梯空上春昊(제공상춘호) - 공중을 사다리 삼아 봄 하늘을 오르구나
俯視人間世(부시인간세) - 인간세상을 굽어보니
塵埃三萬里(진애삼만리) - 티끌이 삼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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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現傳)하는 저서(著書)
ㅇ경세(經世)학: 정현신보(政絃新報), 만언봉사(萬言封事)
ㅇ경학(經學): 사서차의(四書箚義). 고금예설(古琴禮說)
ㅇ지리(地理): 환영지(환瀛誌), 지제지(支提誌)
ㅇ역사(歷史): 명사평(明史評), 상론(尙論)
ㅇ의학: 본초강목(本草綱目)
ㅇ기타: 설류(說類), 원류(原類), 격물설(格物說), 수필집인 연어(然語), 사성록(思成錄), 농가구장(農歌九章),
자회가(自悔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