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참판공(兵曹參判公)


공의 휘는 정철(廷喆, 22世,判書 德和의 子)이며, 호는 만회재(晩悔齋)다. 21세에 무과(武科)에 합격해서 광해(光海 )1610년(庚戌) 선천(宣薦)으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감찰(監察)로 승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역임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정사훈(靖社勳)에 록되고, 갑자란(甲子亂)에 다시 진무(振武) 일등훈에 록되었다.

인조(仁祖) 1627년(丁卯) 청(淸)의 침범과 명(明)의 가도(柯島) 응거 등으로 국토의 서변(西邊)이 근심스러운데 영유도(永柔島) 원님까지 공석이었다. 조정에서는 영유도와 가도의 사태 해결에 적당한 인물을 고르던 중 공을 발탁, 원님으로 임명하니 단기(單騎)로 부임했다. 공은 가도로 들어가 명의 관리들을 상대로 설득했다. 그러자 명군(明軍)의 책임자인 모장군(毛將軍)의 이해를 얻어 나라의 근심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

그뿐 아니다. 조선은 사신(使臣)을 청(淸)에 보내 예물(禮物)을 바치며 사이 좋게 지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청은 명나라에 식량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예물을 물리치는 한편 통신사 박란영(朴蘭英)을 돌려보내고 수행한 군관(軍官)을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당황한 조정은 공에게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재수하고 수도 심양으로 파견했다.

공은 악화일로(惡化一路)의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최후의 카드로 낙점된 인물이다. 청의 우두머리인 한(汗)은 공을 보자 “조선이 명나라에 양식을 지원,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핍박했다. 그럼에도 공은 차분히 그를 설득, 조선의 요구를 관철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외교적 임무를 마친 후 공은 서북 양도순찰사(西北 兩道 巡察使)로 임명됐다. 그는 서영을 개설하고 군무를 경리하며 병제(兵制)를 개혁했다. 그 때 조정은 공을 길주(吉州)책임자로 임명했으나 부임 전에 영흥부사(永興府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했다. 그 때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기 전인 1636年(仁祖ㆍ丙子) 봄이었다.

공은 부임하자 흐트러진 군기를 잡아갔다. 청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병졸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했다. 그러고 있는데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청의 오랑캐가 일만여명의 기병(騎兵)을 앞세우며 양덕(陽德) 국경선 북로(北路)를 따라 쳐들어 왔다.
상황은 위급했다. 공과 남병사(南兵使) 서우갑(徐佑甲)은 우선 합동으로 군사를 주둔하며 대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술은 너무 달랐다. 공은 아군의 중과부적(衆寡不敵)을 이유로 산(山)을 배경삼아 진을 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서병사는 오랑캐를 업신여기며 평원(平原)에 치자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의 군대는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서병사의 군대는 평원에 진을 쳤다. 마침내 철갑으로 무장한 오랑캐의 기마병들은 평원에 있는 조선 보병(步兵)을 가볍게 박살냈다.

오랑캐의 기마병은 이어 공의 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산의 지형을 배경 삼아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평원과는 사정이 달랐다. 산 위에서 아래로 돌을 굴리니 오랑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말이 달릴 수 없으니 돌에 치어 태반이 죽는 공방전이 수일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어느 날 오랑캐 병사가 와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인조왕이 청의 요구대로 항복한 것이다. 공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분을 못 이겨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하고 영흥으로 귀환했다.
그 때 공은 이미 귀향을 결심하고 있었다.

조정은 호란(胡亂)이 끝난 지 8년 후인 인조(仁祖) 1644년(甲申) 공을 숙산(肅山)ㆍ갑산(甲山)ㆍ만포진(滿浦陳)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양하고 고향 관산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졸 후 1806년 죽천사에 배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