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공(水使公)

공의 휘 대기(大器; 21世, 參奉 文甫의 子, 通德郎 元信의 孫, 生員 由貞의 曾孫.지장록p164)다. 신장이 9척에 8백근의 활을 당기며 말을 잘 탔다. 공은 선조(宣祖) 초 무과에 급제, 가리첨사(加里僉使)로 재임 중 이듬해 왜란이 일러나자 전사한 변응정(邊應鼎)의 후임으로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됐으나 취임 전에 취소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가 올려졌다.

이순신 휘하로 동생 대택(大澤), 조카 순정(舜廷), 공시억(孔時億)과 함께 들어가 옥포(玉浦), 적진(赤珍), 율포(栗浦), 당항포(唐項浦) 해전에서 적선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으며, 권율(權慄)원수, 병사(兵使) 황진(黃進) 막하에 들어가 상주(尙州), 진주(晉州)의 전투에서 백전백승을 거두고, 웅치전(熊峙戰)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침 왜적 수 백명이 배를 타고 남양(南洋)으로 들어와 장흥 중령산(中寧山)을 넘어 덮치자 공이 향교 기둥을 뽑아들고 휘저어 적군을 죽여 없앴다. 그 같은 전공을 본령(本營)에 보고하니 처음에는 믿어주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호남연안(湖南沿岸)에 왜구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자 공을 호서수군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로 임명했으나 병이 심해 취임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졸 후 선무원종(宣武原從) 일등훈(一等勳)에 록(錄)되고,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