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한량(漢良, 관북 25世, 호조참판 掌隸決事 弼文의 장남, 참의공 세충의 5세손 지장록 p141)이다. 지략이 뛰어나고,
천근을 가볍게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일찍 무과에 급제하고 임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길에 오르자 의병수백명을 영솔하고
행재소로 달려가 호위했다.
공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라와 군량을 조달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왕은 공의 지략과 노고에 감탄하여 용만판관(龍灣判官)을
제수한 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승진시켰다. 선조는 “관중(關中)의 소하(蕭何)나 하내(河內)의 구순(寇恂)이라도
이렇게 잘할 수 있겠느냐”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 해 황해병사(黃海兵使)를 제수받아 연안일대의 왜적을 소탕하는 공으로 호성일등훈에 록(錄)되고, 기린각(麒麟閣)에
기록하였다. 졸 후 월명사(月明祠)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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