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판서공(戶曹判書公)

공의 휘는 덕화(德和; 21世 1551 ~ 1598, 進士 鯤의 子, 參奉 晉賢의 孫子 지장록p924)다. 선조(宣祖) 1583년(乙酉) 무과(武科)에 급제, 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9년 후 임란(壬亂)이 일어나 서울이 왜군(倭軍)에 의해 함락되자 임금을 호종(扈從), 밤에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피난행렬이 민가에 머물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공이 촌부(村婦)들에게 서숙 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팔진미(八珍味)보다 낫다고 하였다.

피난행렬이 송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이를 때 장흥에서 3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청계공(聽溪公)과 극적으로 해후(邂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조와 좌의정(左議政)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우의정(右議政)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등 조정관리들이 감격하였다. 공은 1593년(癸巳) 참상(參上)으로 승진, 궁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왜군의 괴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또기 요마사(加藤淸正)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공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공이 1596년 내직인 군자훈련정(軍資訓練正)으로 전근할 때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의 체포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그 후 1598년(戊戌) 신병 때문에 귀향해 요양하다 생을 마쳤다. 공이 타계한 후 조정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1613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추증(追贈) 되었고 아들 병조참판공(兵曹參判公) 휘 정철(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과 청나라 회답별사(回答別使) 사행(使行) 등으로 1631년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 배향과 2015년 울산광역시 충의사(忠義祠)에 배향(配享)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