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공(聽溪公)

휘 덕의(德毅; 21世 1540 ~ 1613, 진사(進士) 곤(鯤)의 子, 참봉(參奉) 진수(晉秀)의 손자(孫子))는 선조(宣祖) 1573년(癸酉)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호는 동호(桐湖) 또는 청계(聽溪)로 임란(倭亂)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또는 龍灣)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君臣) 모두가 놀라 마지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명(明)의 장수(將帥) 려응종(呂應鍾)은 공을 보고 “동국(東國)의 산(山)은 천관산(天冠山)이 있고, 사람은 위덕의(魏德毅)가 있어 보배롭다”고 했다. 왕이 귀경한 후 공에게 영남(嶺南) 운향관(運餉官)을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해도 취임하지 않으니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록(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贈職) 됐다. 졸 후 1806년 죽천사(竹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광산 대촌 황산사(黃山祠)에 배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