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봉공 휘 대용(大用; 21世 1530 ~ 1610, 부정(副正) 억문(億文)의 子, 원충(元忠)의 손(孫), 유정(由貞)의 증손(曾孫), 지장록 p916)이며, 호는 괴봉이다. 명종(明宗) 1555년(乙卯)에 진사(進士)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은 가문(家門)의 전통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포기한다. 진사시험에 함께 합격한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와 친구간이다.
임진난이 일어날 때 63세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호남모곡도유사(湖南募穀都有司)로‘나라를
위해 나서라’고 격문을 돌리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했다.
나라에서는 난리 후에 창의사(倡義士) 김천일(金千鎰), 우의장(右義將) 임계영(任啓英)의 포계(褒啓)로 형조좌랑(刑曹佐郞)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졸 후 석천사(石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제향(祭享)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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