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도공(訓導公)

휘(諱) 진수(晉秀)의 막내 아들인 훈도공(휘 鰟 20世 1532 ~ 1593 지장록 p97)은 도백(道伯)의 추천에 의해 고향을 떠나 고흥(高興)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공은 난리가 일어나자 이순신의 한산도(閑山島)진영으로 달려가서 죽기를 맹세한다. 충무공은 이를 가상히 여겨 기존의 고흥 병력과 공이 인솔하고 온 가병 100여명으로 하여금 국도(國島·羅老島)를 방어하라 명령한다. 더구나 그 때 고흥 원님이 규율을 어겨 파면 당하니 홀로 국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산도 전투에 패한 왜군이 퇴각하면서 국도로 달려들었다. 일대 전투가 벌어졌다. 공은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웠다. 비오듯 쏟아지는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다.
아들 덕남(德男)은 쌓여있는 시신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 인근의 한 언덕에 장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공의 묘를 가르치며 장군묘(將軍墓)라며 갸륵한 충성심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