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인으로 용호장군(龍虎將軍) 윤기(潤 琦)의 아들이며 간성군사(杆城郡事)
수(脩)의 손자이다. 선생은 고려말엽에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합문지후(閤門祗侯)·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간성왕(干城王)때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점점 커져 고려조정을 전복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시중 김종연(金宗衍)·심덕부(沈德符)·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池湧寄) 및 조유(趙裕)·장익(張翼)등과
함께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일을 준비하던 중에 함께 모의한 서경천호(西京千戶) 윤귀택(尹龜澤)의
밀고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왕이 평리(評理) 박장(朴藏)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함께 국문(鞠問)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명하였는데
김종연은 사형(死刑)를 받아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공은 장백원류형(杖百遠流刑)을 받아 귀향하는 한편
자손들도 금고형(禁錮刑)을 당하였다.
그때 공이 지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해석1) 송경의 왕기는 이미 재가되어
변하고 참 임금의 새 왕조가 활짝 열렸 도다. 항상 옛 임금 그리며 충절을 지키고자 바람에 나부끼듯 돌아가
자릉대에 누으리라
해석2)「송도(松都)의 왕기는 이미
재가되고, 참 임금 나서 큰 운수 열렸다고 하지만, 옛 임금 향한 일편단심 가실 바 없으니, 표연히 고향에
돌아와 자릉대를 기리네」
松山王氣已成灰 (송산 왕기 이성회)
眞主龍興泰運開 (진주 용흥 태운개)
常念舊君全一節 (상념 구군 전일절)
飄然歸臥子陵臺 (표연 귀와 자릉대)
조선 태조가 개국한 뒤 당시 친위혁명 모의에 가담한 집안의 자손들을 금고(禁錮)에서 풀어주고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으나 유독 선생의 자손들만은 삼세(三世)동안 일체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음직(蔭職)을 내리어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子陵臺(자릉대)
한(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죽마고우이며 글공부가 대등한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같이 잠을 자며 요직등용을
권하나 사양하고 자릉대에서 여생을 보기고 살았다는 곳이다. 즉 자릉대의 명사를 이용한 것은 엄광(嚴光)처럼
지조를 지킨다는 뜻이다. 자능(子陵)은 엄광의 자이며 절강성(浙江省) 부춘산(富春山)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