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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사당/고택

사월재 (沙月齋)

사월재.jpg

<사월재 액호>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에 위치한다. 관북(關北) 입북조(入北祖) 생원공(휘 자공)과 配 수원白氏의 위패(位牌)를 모신 재각이다.  

 

우리 족보는 公이 조선 세종조 때(1419~1450)에 천리타향 함흥으로 가셔서 관북에 위씨의 보금자리를 만드셨다고 적고 있다. 관북지방은 먼 옛날 야인(野人)의 땅이라 해서 특별지역으로 관리했다. 고려 문종 9년(1055)까지도 도명(道名)도 없이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다. 그후에 몇 번 이름이 바꿨으나 조선 초에도 동북면으로 있다가 태종 16년(1416)에 함길도(咸吉道)로 개칭, 세종 때까지 이어졌다. 세종은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키 위해 김종서(1390~1453)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 6진을 개척하고, 그 진에 남방의 민호(民戶)를 이주 시켰다. 公 또한 조정의 이주정책에 따라 사고무친의 낯선 땅으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북 초보(1689)의 서문에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후손들은 월명사(月明祠)를 지어 주벽으로 위패를 봉안해 제향을 드려왔다. 6. 25사변으로 인해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면서 제향을 올릴 길이 없었다.  

 

사월문중 후손들은 수가 적고 門財가 빈약한 여건에서 갖은 노력과  장흥향교(長興鄕校) 전교(典校)를 역임한 계암공(휘 성재, 1905~1980, 사월 덕원부사공 13대손)의 주도로 1966(丙午)년에 이곳에 재각을 건립하고 남북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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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량문(上樑文)은 1966(丙午)년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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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월재기(沙月齋記)는 1977(丁巳)년 청헌공(휘 성인, 1904~1977, 사월 덕원부사공 13대손)이 근술(謹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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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계암공(휘 성재, 1905~1980)이 기록(記錄)하다.

사월재팔경 대환.jpg

(4)사월재팔경(沙月齋八景)은 ①사월초가(沙月樵歌), ②율리청풍(栗里淸風), ③계산제월(桂山霽月), ④억불봉화(億佛烽火), ⑤연암귀운(連巖歸雲), ⑥용강어적(龍江漁笛), ⑦침향귀범(沉香歸帆), ⑧부용낙조(芙蓉落照)이며, 1978(戊午)년 백당공(휘 대환)이 고(稿)하다.

 

1985(乙丑)년 남북(南北) 후손들이 참여하여 경내에 생원공의 유장비(遺莊碑)를 근수(謹竪)하고 매년 陰 10월 첫 일요일에 제향 한다. 편액 글씨는 벽강(광산人, 김 호)이 장천재 육각정(六角亭)과 같이 썼다.

사월문중 덕원부사공파종중 소유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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