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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魏氏 遺跡의 巡禮 코스(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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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山 위정철(32世, 존재기념사업회 이사)

1. 장흥 위씨 뿌리 약사
위씨는 희(姬)씨, 필(畢)씨를 거쳐 BC 661년에 득성한 성씨이다.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의 아들 희발(姬發)이다. 그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응징하려 BC 1046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문왕의 15째 아들 희고(姬高)도 형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대부에 임명되고 필지(畢地)를 봉토 받아 필씨가 됐다.
그러다 필고(畢高)의 후손들은 서민으로 전락했다. 후예인 필만(畢萬)은 진(晉) 헌공(獻公)이 곽(霍), 위(魏), 우(虞), 괵(虢)나라를 병탄할 때 참승으로 헌신했다. 그래서 대부가 되고 위지를 봉토 받으면서 위씨의 시조가 된다. 그러니 지구상의 ‘나라 위씨’는 그의 후손이다. 당나라 때 동래해 한국 위씨의 시조 휘 경(鏡)도 필만의 후손이다.

2. 중국 역대제국 도읍
중국은 수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대국이다. 그 드넓은 땅을 바탕으로 숱한 나라가 명멸해왔다. 여러 나라의 도읍지는 건국의 가장 큰 요소이다. 수도가 들어설 땅은 방위는 물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고루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역대 나라의 도읍지이다.

1) 三代와 春秋戰國시대
(1) 夏 : 陽城, 陽霍, 安邑
(2) 商殷 : 商(亳), 殷(洛陽) 등 8곳
(3) 周 : 西周(鎬京 陜西省 西安), 東周(洛邑)
畢萬의 封邑 : 芮城縣(山西省)
魏國 : 霍州, 夏縣(禹王城), 安邑(魏豹城)
魏國 : 大梁(開封)

2) 秦의 統一 이후
(1) 長安 : 西周, 秦, 西漢, 後秦, 後周, 隋, 唐 등 13國
(2) 東京 : 東周, 東漢, 魏, 晉, 後趙, 後魏
(3) 北京 : 燕, 遼(副都), 金(大都), 元(北京), 明, 淸, 中國
(4) 南京 : 楚(金陵), 吳(建業), 東晉, 南宋, 齊, 梁, 陳, 南唐, 明, 太平天國, 中華
(5) 開封 : 後粱(五代), 後晉, 後漢, 北宋, 金

3. 위씨의 연고지
위씨와 연고지는 곽주를 제외하고 4곳이나 우왕성은 중복된다. 첫째는 득성지(得姓地)다. 춘추시대 위국(魏國)을 필만이 봉토 받으면서 위씨성을 가지게 된 땅이다. 둘째는 BC 403년 제후국과 왕국의 도읍지인 안읍(安邑)이다. 제후국 8대와 왕국 3대 혜왕(惠王)까지 수도였던 셈이다. 셋째는 혜왕이 외침을 견디지 못하고 천도한 개봉(開封)이다. 개봉은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북송, 금나라의 도읍지가 됐던 곳이다.

4. 유적과 관광지

1) 예성현(芮城縣) : 춘추시대 제후국인 위국(魏國)은 득성지(得姓地)이기 때문에 후손들은 반드시 가봐야 할 땅이다. 이곳은 협서성(陜西省) 서안(西安, 長安)과 산서성(山西省) 낙양(洛陽)과 중간지점이자 하남성과는 경계에 위치한다고 한다.

2) 안읍(安邑) : 우왕 때 하(夏)나라의 수도였다. 안음(安陰) 또는 평양(平陽)이라고도 부른다. 위씨로서는 예성현 위지와 더불어 조상들과의 인연이 가장 깊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3) 낙양(洛陽, 洛邑) : 중국 5대 서울 중 동경(東京)이다. 10대 고도(古都)로 BC 771년 동주(東周)를 비롯해 진(晉), 동한(東漢), 후조(後趙), 후위(後魏), 원(元) 등 9개 왕조의 수도로 유명하다. 원나라 때 북경(北京)으로 천도했다. 주변에 유적들이 많다. 현재 낙양은 시내의 인구 50만명, 외곽의 인구 30만을 합쳐 80만 명이다.

(1) 태항산(太行山) : 중국 중북부 산서성과 하남성과의 경계를 이루는 400km 길이의 산맥.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있다.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배경이 되는 산이며, 서남쪽의 끝자락 타이항 대협곡에는 팔천협·홍두협·흑룡담·청룡협·자단산 등의 주요 관광지구 5곳을 포함하고 있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2) 영락궁(永樂宮) : 원래의 이름은 대순양만수궁(大純陽萬壽宮)이다. 원나라 때인 1247년부터 1358년(乾隆 12년~咸豐 8년)까지 11년에 걸쳐 예성현(芮城縣)에 지은 도교사원이다. 그러나 1959년 삼문협(三門峽)에 댐을 건설하면서 1기존의 위치에 북쪽으로 3㎞ 떨어진 용천촌(龍泉村)으로 이설, 1964년에 완공했다. 내부에는 삼청전(三淸殿) 또는 무극정(無極殿)을 비롯 순양전(純陽殿), 중양전(重陽殿), 용호전(龍虎殿) 등의 전각이 있다. 전각에는 960㎢ 규모의 벽화가 있다.

(3) 백마사(白馬寺)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불교의 전래와 관련된 감몽구법(感夢求法) 설화를 토대로 낙양교외 동쪽 12km 지점에 건설한 사찰이다. 백마사는 전승 및 문헌으로 확인되는 중국 최고(最古)의 절이기도 하다. 서기 68년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 경내에서 만난 왕준, 채음(蔡愔) 등 후한의 사신을 따라 흰 말에 《사십이장경 42章經》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왔다는 전설에 따라 백마사(白馬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마사는 두 승려들이 머무르면서 가지고 온 불경을 번역했던 홍려관(鴻臚館) 자리라고 한다.

(4) 용문석굴(龍門石窟) : 뤄양(낙양)시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이수이(伊水) 강변 양쪽 벼랑에 벌집처럼 뚫린 석굴이 1km 남짓 이어진다. 룽먼 석굴은 둔황의 막고굴, 산서성 다퉁(大同)의 윈강 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493년 북위(北魏)가 도읍을 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기고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한족의 땅이라 할 수 있는 중원에 입성하자 민족 간 융화를 위해서 불교를 택했다. 이 시기 뤄양에 지은 불교 사원만 1,367개이다. 황실 비호 속에 국가사업의 일환으로 석굴 사원을 조성했는데, 룽먼 석굴이 대표작이다. 북위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400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북위와 당나라가 가장 열정적이었다. 총 2,345개 석굴과 감실에 불상 110,000여 존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북위의 것이 30%, 당나라의 것이 60%를 차지한다. 북위를 대표하는 석굴로는 고양동, 연화동, 약방동, 빈양동 등이 있고, 당나라 것으로는 만불동, 봉선사, 잠계사 등이 유명하다. 석각 외에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가 돌에 새긴 2,800여 점의 비각(碑刻)과 제기(题记)이다. 중국 서예사에서 명필로 꼽히는 필체를 직접 볼 수 있다.

(5) 낙양박물관 : 낙양박물관은 서안이나 蘭州와 비하면 조촐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훨씬 충실하다.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서 살해된 뒤에 더 이상 두 군데 거점을 유지할 수 없어 송주를 포기하고 성주 즉 낙양만을 지켰다. BC 770년으로 이후를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실제로는 주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제후들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되자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6) 雲臺山 : 하남성 정주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초작시(焦作市) 수무현(修武縣)에 속한 산이다. 협곡의 깊이가 168m에 이르는 홍석협(紅石峽), 낙차 314m의 가장 높은 폭포는 운대천폭(云台天瀑), 맑은 물은 담폭협(潭瀑峽)등이 있다. 운대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자 국가중점풍경명승구, 국가5A급풍경구, 삼림공원, 수력풍경구, 미후자연보호구 등의 칭호를 가진 산이다. 운대산은 2004년 중국이 지정한 10대 명산 가운데 황산과 노산에 이어 3위가 운대산 이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숭산과 장가계가 각각 7, 8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홍석협(紅石峽)은 운대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붉은 색의 기묘한 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녹색의 절묘한 물로 명성을 떨쳐 일찌기 화하 제일기협(華夏第一奇峽)으로 알려진 곳이다. 총길이 2km의 협곡으로 샘물, 폭포, 계곡등 여러 경치가 한골짜기에 모여있다. 붉은 색의 석영사암층(石英砂岩層)이 2천 3백만 전부터 조산(造山) 작용과 물의 침식을 거쳐 지금의 홍석협을 만들었다고 한다.

(7) 嵩山과 少林寺 : 쑹산은 불교 성지로도 유서가 깊다. 중원에 동서로 75km나 뻗은 쑹산은 크게 동쪽의 타이스 산(太室山)과 서쪽 사오스 산(少室山)으로 나뉜다. 두 좌의 수십 개 봉우리와 골짜기에 불교 사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사오스 산의 오유봉(五乳峰) 숲에 은둔해 있는 소림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소림무술 ‘쿵푸’의 발상지로 알려져서 세계 각국에서 여행자와 수련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중악의 정상을 등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림사를 볼 목적으로 쑹산을 찾는다.

(8) 禹王城·關羽·白居易·司馬光의 墓

(9) 大相國寺 : 원래 전국시대의 위나라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无忌)가 3000식객과 더불어 살았던 사저(私邸)였다. 북제(北帝) 때인 555년 남북조시대 건국사(建國寺)란 이름의 사원을 지었다. 이후 당나라 시대 무측천(武則天)에 의해 폐위됐던 예종(睿宗)이 복위하면서 상왕(相王) 신분에서 황제를 계승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712년에 대상국사(大相國寺)라는 편액을 내렸다. 대상국사는 수호지에 등장한 노지심(魯智深)이 큰 나무 뿌리를 뽑는 동상이 있으며 삼국사 부근 채소밭으로 노지심이 80만 금군(金軍)의 교두인 임충과 의형제를 맺은 곳이다.

(10) 魏惠王의 墓 : 위나라 3대왕이다. 그는 방연(龐涓)에게 8만 병력을 주면서 북쪽의 조(趙)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자 조나라는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도 책사 손빈(孫臏)에게 8만 병력을 주어 BC 341년 마릉(馬稜)전투에 대비했다. 방연은 손빈은 감조지계(减竈之計)로 패한 후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이후 계봉(啓封)이라 불렀다가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자신의 이름 계(啓)자를 피하기 위해 개봉(開封)으로 바꿨다고 한다. 혜왕의 묘(陵)는 정주시 중묘현(中牟縣)에 있다. 4대 양왕(襄王, 魏嗣)의 묘는 위휘시 서남12공리, 6대 안리왕(安釐王, 魏圉)의 묘도 또한 위휘시 구서남 12공리에 있다고 전한다.


(별첨)
◇長安 또는 西安 : 춘추전국의 오랜 분열과 전쟁이 끝나고, BC 221년 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섬서성의 함양을 수도로 정한다. 함양 또는 장안은 위하(渭河)평야 이남에 위치한 지역으로 진에 이어 서한(西漢) 즉 전한도 장안을 수도로 정했다. 수와 당은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지만 낙양을 동도 혹은 동경이라며 부도(副都)로 이용했다. 역사상 13개 왕조가 무려 1100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유구한 왕도이다. 장안을 대변하는 말이 있다. “중국의 100년을 알고 싶으면 상해(上海)를, 500년을 알고 싶으면 북경(北京)을, 3000년을 알고 싶으면 장안(長安)을 가보라”고 한다. 이곳에 세계 8대 기적으로 꼽힌 진의 병마용(兵馬俑), 한의 테라코타, 당나라 황제들의 로맨스와 시안사변의 무대인 화청지, 중국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서안박물관이 있다.
華淸池와 西安事變란시안시의 북동쪽 30km 지점, 리산(驪山)기슭에 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황제들의 온천지이며 당 현종(6대 황제)과 양귀비의 로맨스 장소로 더욱 유명하다. 가장 먼저 발견된 온천으로 현재 목욕탕 유적지만 남은 상태다. 온천 온도는 43℃ 정도이다. 당 현종이 목욕했던 곳 ‘성진탕(星辰湯)’, 양귀비가 목욕했던 곳 ‘귀비지(貴妃池)’, 두 사람이 목욕했다는 ‘연화탕(蓮花湯)’, 양귀비가 목욕 후 머리를 말렸다는 ‘양발대(凉髮臺)’가 있다. 황제의 밥을 짓던 사람들이 목욕했다는 ‘상식탕(尙食湯)’에는 손으로 발을 씻을 수 없던 그들을 위해 바닥에 발꿈치를 씻을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다. 그 외 화청지는 시안사변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1936년 12월 12일 총통 장제스(蔣介石)를 향한 총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집무실이었다는 오간청 벽면에 총구멍 자국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2019년 5월 22일

원산 위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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