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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사당/고택

죽천사 (竹川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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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천사 액호>

죽천사 양춘재(陽春齋)는 장흥군 관산읍 죽교리 418번지에 위치한다. 장흥 위씨 향사우(鄕祠宇) 세 곳 중 하나이다. 향사우의 임원은 다른 성씨이며 이들의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므로 문중에서 드리는 문사우(門祠宇)보다 영예로운 것이다.

1688(戊辰)년에 지역유림 100명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달량진사변(達梁津事變) 때 순절한 장흥부사 한 온(청주人, 1511~1555)과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선조를 90일간 걸어서 의주로 찾아가 배알한 청계공을 주벽으로 배향한 사우이다. 당시에는 솔치재 아래에 세웠고 명칭도 충렬사였다. 1689(己巳)년에 후손들과 장흥의 유림들이 장흥읍 충렬리에 충렬사를 건립한 후 한 온의 신위(神位)를 옮겨감에 따라 청계공만 독향(獨享) 하게 되면서 "죽천사" 라고 했다. 그 후 1797(丁巳)년에 관암공(휘 상정, 1753~1799, 청계공 5대손)께서 헌성금을 들여 대대적인 중수공사를 하였다.

1806(丙寅)년에 청계공(휘 덕의, 1540~1613)을 주벽으로 임진왜란 때 功이 큰 공조참의공(휘 덕원, 1549~1616), 판서공(휘 덕화, 1551~1598)과 갑자·정묘·병자호란 때 功을 세운 청금공(휘 정훈, 1578~1662), 병조참판공(휘 정철, 1583~1657), 반계공(휘 정명, 1589~1640)과 호남유학의 거목 존재공(휘 백규, 1727~1798)등 6顯祖를 추배(追配)하였다.

1868(戊辰)년에 사원 훼철령으로 철거된 후 1898(戊戌)년에 옛터에 설단(設壇)하여 제향 하였다. 1928(戊辰)년에 관산과 용산 간의 솔치재 도로가 나게 되자 춘헌공(휘 계반, 1848~1939, 청계공 10대손)의 주도로 7현(顯) 각 종중(宗中)에서 기금을 마련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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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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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죽천서원중수기(竹川書院重修記)는 1797(丁巳)년 5대 족손 존재공(휘 백규)이 근서(謹書)하다. 1974(甲寅)년 의재공(휘 석한, 1900~1982, 청계공 9대손)이 근지(槿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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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양춘재중수상량문(陽春齋重修上樑文)은 1917(丁巳)년 춘헌공(휘 계반)이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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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춘재중수기(陽春齋重修記)는 1917(丁巳)년 죽헌공(휘 계창, 1861~1943, 청계공 10대손)이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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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증 위진사정헌호국천(贈 魏進士廷獻號菊泉)은 1630(庚午)년 김우급(金友伋 광산人, 호(號) 추담(秋潭), 1574~1643, 병조참판 追贈)이 찬(撰)하여 추게(追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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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재 여응종 동종기략.jpg

(5)대명참군(大明參軍) 여응종(呂應鍾) 동정기략(東征記略)은 1930(庚午)년 추게(追揭)하였다.

양춘재 죽천사 연혁 실기 정량.jpg

(6)죽천사연혁실기(竹川祠沿革實記)는 1964(甲辰)년 관초공(휘 정량, 1895~1968, 청계공 11대손)이 기술(記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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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재 경내 시운 편액 글>

양춘재 경내에는 총 6개의 편액 글씨가 소장(所藏)되어 있다. 한편 죽천원지(竹川院誌)는 1984(甲子)년 무송공(휘 계호, 1905~1987, 청계공 10대손)이 간행했다. 매년 陰 9월 上丁日에 제향 한다.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역수헌(윤용구)이 썼고, 내삼문 경의문(景義門) 편액 글씨는 낙관을 남기지 않아 글쓴이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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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재 액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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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월문>

강당인 양춘재(陽春齋)는 1917(丁巳)년 춘헌공(휘 계반)의 주도로 신축하였다.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소석(광산人, 김노현)이 썼고, 외삼문 요월문(邀月門)은 석촌(윤용구)이 썼다. 주변 청계공의 墓前 제향은 매년 陰 10. 5일이다. 청계공파종중 소유다.  

 

청계공 묘소.jpg

<청계공 묘소 中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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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청계공 병조참의 추증 교지>

  ※ 청계공(휘 덕의) : 1540∼1613년, 진사공(휘 곤)과 배(配) 광주李氏 사이에서 차자(次子)로 태어났다. 1573년(癸酉)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장흥(長興)에서 선조(宣祖) 임금이 계신 의주(義州)까지 90일간 걸어와 배알(拜謁)하였다고 전(傳)한다. 선조께서 귀경한 후 공(公)에게 영남(嶺南) 운향관(運餉官)을 제수 받아 소임을 다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 못하자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록(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됐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죽교리 양춘재 옆 상잠산 자락이다. 죽천사(竹川祠)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과 광산 대촌 황산사(黃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김노현(金魯鉉) 이력 : 1841~1915, 본관 광산(光山), 자는 공범(孔範), 號는 소석(小石)이다. 대사성(大司成) 김성옥(聲玉)의 후손으로 화오 김최엽의 아들로 1841년(헌종 7년)에 태어났다. 연암공(휘 영경, 1797~1871)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연재(淵齋) 송병준에 집찬(執贊)하여 성취하였다. 사서(四書) 오경(五經)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고 특히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지은 책을 힘써 익히고 이를 늙어서도 강독(講讀)하였다. 칠순(七旬)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였으며 오직 영민(英敏)하고 빼어난 제자를 길러 내는데 즐거움을 삼으니 공의 문하에서 위계룡(魏啓龍),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크게 대성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다산재(茶山齋)에서 거처하면서 항상 존재공(휘 백규)을 우러러 그리워한 나머지 단(壇)을 쌓고 2월 보름이면 창주(滄州) 고사(故事)에 따라 제사를 모시면서 부시(賦詩) 윤강(輪講)하는 규례(規例)를 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 윤용구(尹用求) 이력 : 1853~1939, 본관 해평(海平), 자 주빈(周賓), 號 역수헌(亦垂軒)‧석촌(石村)·해관(海觀)·장위산인(獐位山人), 1871년(고종 8) 정시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예조(禮曹)·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법부·탁지부·내무대신에 10여 차례 임명되나 모두 사절하고 서울 성북구 장위산(獐位山) 밑에 은거와 유랑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해서(楷書)·행서(行書)·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죽란(竹蘭)도 잘 그렸다. 국권피탈(國權被奪) 뒤 일본정부가 남작(男爵)을 수여하려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글씨에 문간공한장석 신도비(文簡公 韓章錫 神道碑), 선성군 무생 이공 신도비(宣城君 茂生 李公 神道碑), 그림에 묵죽(墨竹) 등이 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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