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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사당/고택

죽헌고택 (竹軒古宅)

죽헌고택.jpg

                                                                  <죽헌고택 전경>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477번지에 위치한다. 1986. 2. 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6호 위성룡 가옥으로 지정되었다. 안채는 1946년(丙戌) 신축한 一字형 6칸 전후 툇집이며 겹집의 형태이다. 간살이는 북쪽 앞 2칸은 부엌이며 뒤 2칸은 좌우 방이다. 다음이 큰방이고 중앙은 2칸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며 우퇴가 놓여 있다.

죽헌고택 안채.jpg죽헌고택 사랑채.JPG

                 <안채>                                                                  <사랑채>

사랑채는 1919(己未)년에 지어졌다. 4칸 전후 툇집으로 간살이 북쪽으로부터 앞 칸은 방이고 뒤 칸은 헛간으로 되어 있고 다음 2칸의 앞 칸에는 크게 방을 두고 뒤 칸에도 좌우로 방을 두었다. 맨 끝 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각 툇칸에는 창고 방이 시설되어 있다.

죽헌.jpg계은.jpg

                   <죽헌>                                                                 <계은>

상산재기(정의림).jpg<                                            <상산재 記 일신재 정의림> 

상산재기(기우만).jpg

                                                        <상산재 記 송사 기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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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헌 원운> 

경차 죽헌(이종문).jpg

                                 <경차 죽헌 위옹 회갑운 석담 이종문> 

사랑채에 걸려있는 (1)죽헌공(휘 계창, 1861~1943)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설주의 형(兄) 소파(송명회, 1872~1953)가 썼고, (2)계은공(휘 대량, 1884~1951)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설주(송운회)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3)심석(心石) 정의림(鄭義林 광산人, 1845~1910)과 (4)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행주人, 1846~1916)이 찬(撰)한 "상산재기(觴山齋記)"가 있다. (5)죽헌공(휘 계창)이 쓴 죽헌원운(竹憲原韻) 및 (6)석담 이종문이 쓴 경차죽헌위옹회갑운(敬次竹軒魏翁回甲韻) 등 6개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청계공 13대손이자 죽헌공 증손인 성룡 종친의 소유다.

 

 ※ 정의림(鄭義林) 이력 : 광산人, 1845~1910 자(子)는 계방(季方), 호(號) 일신재(日新齋)‧심석(心石), 응교(應敎) 정태(鄭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제현(濟玄)이고,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딸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행주人, 1798~1876, 성리학자)의 3대 제자 중 1인으로, 노사학파의 인물 중 비교적 큰 규모의 문인 집단을 형성한 사람이다. 또한 나라가 일제에 의해 잠식되어 가자 호남대의소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정의림의 문인 수는 『일신재집』의 문인록에는 265명으로 수록되어 있고, 『노사 선생 연원록』에는 재전제자까지 합쳐 879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의림은 1893년에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 마을에 영귀정(詠歸亭)을 축조하고 9성(聖)의 진영을 봉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1927년에 간행한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1967년에 간행한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일신재집(日新齋集)』이 전한다.

 

 ※ 송명회(宋明會) 이력 : 여산人, 1872∼1953, 호(號) 소파(小波), 자(字) 남일(南一)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남보다 뛰어나 5세에 글을 읽었다. 7세에 연정(蓮亭) 이기선(李基善)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연정공이 시재(詩才)가 있다고 여기고 관해(觀海)라는 시제(詩題)를 주니 거뜬히 지어 내므로 천재라고 경탄하였다. 1893(癸巳)년에 영재(이건창, 1852~1898)로부터 사사하였다. 그의 문장은 대개 영재공으로부터 나왔다고 보았으나,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절묘하기가 청어람(靑於藍)이라고 하였다. 1898(戊戌)년에 연재(송병선, 1836~1905)를 배알하였는데 그 재주를 보고, 자기 제자처럼 아꼈다. 1900(庚子)년에 면암(최익현, 1834~1907) 다음해 매천(황 현, 1855~1910)을 찾았는데 매천과는 며칠을 함께 시를 논하며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았다. 동강(東江) 김영한(金寧漢)은 “호남의 시가(詩家)로서 매천 이후에 소파(小波)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묘지는 율어면(栗於面) 율변촌(栗邊村) 후 임좌지원(壬坐之原)이다. 시문집으로 『소파선생문집(小波先生文集)』이 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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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3-14 15:57 *.211.38.102

가본지는 못했지만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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