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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사당/고택

영귀정 (詠歸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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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귀정 액호 동계 이우명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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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 액호 석촌 윤용구 作>

 원래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 마을 앞 예양강변 산속에 위치했었다. 정자(詠歸亭)와 재각(鳳德齋)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단산(丹山)의 입향조(入鄕祖)인 계은공(휘 사갑, 1704~1756, 판서공 5대손)의 5대손인 복재공(휘 계민, 1855~1923, 판서공 10대손)이 조부님 만포공(휘 필조, 1797~1875, 1869년 장흥향교 재장 역임)과 아버님 손암공(휘 준권, 1831~1900, 1893년 장흥향교 재장 역임)의 제각과 후학들의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키 위해 1887(丁亥)년에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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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세관산 진사 김채규 作>                                  <북재 재당 액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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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덕재상량문(鳳德齋上樑文)은 1915(乙卯)년에 복재공(휘 계민)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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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귀정상량문(詠歸亭上樑文)은 1921(辛酉)년 복재공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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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영귀정기(詠歸亭記)는 1923(癸亥)년 전 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前 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 무정(茂亭) 정만조(동래人, 1858~1936)가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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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귀정기(詠歸亭記)는 1922(壬戌)년 복재공(휘 계민)이 찬(撰)하다.

영귀정 복재기 기우만.jpg

(5)복재기(復齋記)는 1903(癸卯)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 ~1916)이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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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봉덕재원운(鳳德齋原韻)은 1916(丙辰)년 복재공(휘 계민)이 근고(謹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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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영귀정원운(詠歸亭原韻)은 1922(壬戌)년 복재공(휘 계민)이 고(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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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근차영귀정운(謹次詠歸亭韻)은 1922(壬戌)년 후은(後隱) 이학로(李學魯 벽진人, 1867~1933, 의병장‧독립운동가)가 근고(謹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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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보운기제영귀정(步韻寄題詠歸亭)은 1923(癸亥)년 전자헌대부성균관장(前資憲大夫成均館長) 초원(初園) 서상훈(徐相勛 대구人, 1858~1943, 친일인)이 근고(謹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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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근차영귀정운(謹次詠歸亭韻)은 1922(壬戌)년 봉강공(휘 계래, 1860~1941, 판서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영귀정 판상운 위헌규.jpg

⑤근추차(謹追次)는 1925(乙丑)년 동강공(휘 헌규, 1890~1960, 판서공 11대손)이 찬(撰)하다.

영귀정 십경 문병상.jpg

(7)영귀정십경(詠歸亭十景)은 ①두륜낙조(斗輪落照), ②교봉제월(轎峯霽月), ⓷단산취연(丹山炊煙), ④청소어화(淸沼漁火), ⑤죽등농가(竹嶝農歌), ⑥동막초적(桐幕樵笛), ⑦마암청풍(馬岩淸風) ⑧증봉낙하(甑峯落霞), ⑨강시주기(江市酒旗) ⑩산사반종(山寺飯鍾)으로 1949(己丑)년 청호(靑湖) 문병상(文炳常)이 근서(謹書)하다. 특히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구한말 때 관북 함흥종친들이 본향에 내왕 시 영접(迎接)과 수창(酬唱)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때 본향에서 참여한 인물은 춘헌공(휘 계반, 1848~1939, 청계공 10대손), 복재공, 계사공(휘 택기, 1858~1940, 안항공 8대손), 죽암공(휘 계문, 1865~1951, 판서공 10대종손), 오헌공(휘 계룡, 1870 ~1948, 안항공 10대손)등이 있다. 영귀정 경내에는 12개 시운 편액 글이 걸려 있어 단산마을 선대(先代)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 후 도난 우려 때문에 복재공의 현손인 승철 종원이 자가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4개 편액이 있다. 이중 4개 편액중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동계(이우명, ~ ?)와 전숭록대부판돈녕원사(前崇祿大夫判敦寧院事) 석촌(윤용구)이 썼다. 백세관산(百世冠山)은 진사(進士)를 한 청사(김채규, ~ ?)가 필자이며, 복재 재당(齋堂) 편액이 있다. 판서공 14대손이자 복재공의 현손 승철 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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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산리 연혁>

단산마을은 계은공(휘 사갑)께서 입향(入鄕)한 후 250여년 후손들이 거주하여 한때는 50호 이상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또한 1850~1950년 간에는 본향(本鄕) 내 유림사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어 장흥부사에 임명(任命)되면 부임(赴任) 전(前)에 인사차 먼저 단산을 찾아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인물로는 농암공(휘 찬조, 1797~1870, 1859년 재장), 만포공(휘 필조, 1797 ~1875, 1869년 재장), 낙청헌공(휘 형권, 1819~1899, 1883년 재장), 담은공(휘 윤권, 1829~1906, 1891년 재장), 손암공(휘 준권, 1831~1900, 1893년 재장), 단계공(휘 계홍, 1838~1914, 1899년 재장), 단강공(휘 경규, 1887~1947, 1937년, 1946년 직원)등 6분께서 7번 장흥향교의 총 책임자인 지금의 전교(典校)를 각각 역임하였다. 또한 월곡공(휘 계채, 1849~1892)이 경남 단성현감 역임 등으로 단산의 문세(門勢)를 짐작케 한다. 이 중 단강공은 1938(戊寅)년 판서공(휘 덕화) 신도비(神道碑, 방촌 유물관 앞에 위치) 근수(謹竪) 시 치성보조(致誠補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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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산 망향비>

그 후 2006(丙戌)년에 정부의 주도로 전남 목포 등 서남권 9개 시‧군의 상수문제를 해결키 위해 장흥 댐이 준공되어 단산마을은 수몰(水沒)되었다. 영귀정을 보존키 위해 장흥읍에서 유치면 신소재지로 가는 새로운 도로변 산자락인 유치면 송정리 산 90-9번지로 이전했다.

 

 ※ 정만조(鄭萬朝) 이력 : 동래人, 1858~1936, 자(字) 대경(大卿), 호(號) 무정(茂亭) 한말 식민지 시대의 한학자로 서울 출신이다. 강위(姜瑋, 진주人, 1820~1884, 학자·개화사상가)의 문인으로 188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94년 내부참의(內部參議)가 되었다. 1896년 무고(誣告)를 받아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었다가 12년만에 풀려났다. 한일합방 후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 조선총독부중추원(朝鮮總督府中樞院)의 촉탁(囑託), 조선사편수회위원(朝鮮史編修會委員)을 지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강사가 되었다. 1926년 경학원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총재를 겸임했고 이왕가실록편찬위원이 되어 편찬 사무를 맡았다. 저서(著書)로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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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3-14 16:05 *.211.38.102

단산리에 있다가 수몰되어 옮기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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